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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윤의 '소설쓰는 여자'(현대문학, 2008)는 세가지 이야기를 겹쳐 놓았다.

우선, 아버지를 모르는 기생의 딸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주인공 '나'는 '오직' 소설을 쓰기 위해 파출부가 된다.

그 역시 생생한 체험을 위해 집 남편과 정사를 벌이고 기여코는 간통으로 '빵'에 갔다 고향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고향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다. 고향은 첫사랑과 어머니의 상징이다.

궁극적으론, 이른바 '가출'의 원인을 제공한, 세상과의 거친 싸움에 애써 자신을 내던진 계기를 제공한, 기생 엄마와의 화해다. 첫사랑의 아픔과 시대의 아픔을 뒤로 한 채 다시 맞서는 세상, 그 시대와의 화해다.

또 하나의 이야긴 소설 창작법을 가르치는 사설 학원의 강사가 화자다. 이야기라기 보다는 강의 자체다. 마치 녹음을 푼 것 같다. 마지막 하나는 주인공인 내가 쓰는 첫번째 소설이다. 요약하면 어떤 파출부가 본 두 집 이야기다. 간통으로 비극에 이르는 '통속소설'이다. 이 소설은 전체 소설과 이야기체도 다르다. 특이하게, '습니다'체 다.

물론 주인공인 '내'가 두번째 이야기인 '소설 작법 강의'를 듣고 있음을 가정하면 주인공이 모두 같은, 하나의 이야기다.

세 개의 이야기가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은 이런 점에서다. 독자가 보기에 파출부가 그 집의 남편과 정사를 벌이는 것은 '통속'의 전형같다. 이럴때 소설 작법 강사가 소설의 통속성에 대해 강의한다. 또, 주인공의 첫번째 소설에서 파출부가 일을 하는 또 다른 집의 가장인 전직 장성(군인)의 해괴한 일상이 으아할 때 즈음, '캐릭터의 중요성'에 대해 강사는 열변을 토한다. 물론 최초로, 주인공이 파출부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에 등장하는 강의 주제는 '발상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렇게 특이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바는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소설의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쓰기의 욕망과 그 목적, 결과에 대해. 결국 소설은 무엇인가를 지독히 욕망하는 자신의 이야기며, 쓰기와 읽기가 만나 교호하는 장이 아닐까? 쓰는 작가와 읽는 독자의 만남이 변증법적 전환에 따라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장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 불편한 구석이 없지 않다. 고향에 내려간 주인공이 겪는 세상, 그 또다른 삶이 너무나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다른 이야기를 잘라 붙인듯 하다. 이야긴 통속적인 연애소설이건 순수문학이건 간에 물 흐르듯 흘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억지로 잘라 붙이고 오린 작위와, 물 길을 다른 곳으로 틀어 이끄는 의도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작가가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이야길 풀어가야 한다는 말과는 또 다른 의미다.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긴 또 무엇인지 생각거리만 잔뜩 떠 안고 말았다.

Posted by 두덕재
(책은 읽었으되, 나눌 것이 비록 없다 하여도, 애써 살 필요가 없다는 정보를 얻는 것만으로도 좋은 나눔이 되려니...제 블로그와 함께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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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 내 자신에게 명분이 필요했다. 함께 공부해 보고자 했던 동료들에게 이야깃거리라도 줄 수 있을까 했다. 추상적으로 '공부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의 미래'를 예측해 볼 수 있고 또 함께 뭔가를 준비해 보자는 것에 두었기 때문이다. 앞서도 조급한 나를 발견했지만, 여전히 실망스럽다. 미래를 '미래를 예측하는 책'으로 알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기 때문이다.

우선 '2010 대한민국 트렌드'(LG경제연구원, 2005, 한국경제신문)의 주요 예측이 이미 실현되고 있어서 '미래'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은 벌써 2년 전에 나온 '구간'이다. 특히 IT, BT로 대표되는 디지털 트렌드는 너무 진부해서 맥이 빠질 정도였다. 이제까지는 2년 전에 나온 미래 예측서를, 그것도 많이 돌려 읽어(무려 58쇄다!) 어딘가에서 들어보고 또 되뇌어 봤음직한 정보로 가득찬 책을 선택한 내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조금 사납게 이야기하자면, 책의 내용 자체에도 필자들인 LG 경제연구원들의 무성의가 느껴져 독자로서 화가 모락모락 피워올랐다. 인용이나 야야기의 전개가 마치 준비안된 강의를 억지로 하는 모양새였다. 책의 발행이 1월인 것을 보면, 아마도 각자 맡은 프로젝트를 12월까지 끝내면서 부랴부랴 써 낸 원고를 모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에 눈길을 준다. 기존의 기술과 조직을 이어가는 혁신인 '존속성 혁신'의 반대말이어서 뭐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기존 고객의 전통적인 기대와 전혀 다른 내용과 가치를 개발하여 새로운 고객을 창출해 낸 기업과 그 혁신과정에 대해서 책장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새로운 기능, 가치, 그래서 아직도 묻혀있는 보석같은 고객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을 뒤집는다는 것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나 역시 내가 생각하고 그리고 있는 미래의 삶에 대해 너무 제한적이지 않은가?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낸다는 생각보다 나를, 우리를,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을, 우리 주변을 빈틈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역시 미래는, 다시 말하건데, 미래를 말하는 곳에 없다. 고전은 미래를 말하지 않지만 미래를 낳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Posted by 두덕재
사실 혼잡한 전철이 싫어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한다. 전철 안은 삥이나 뽕이지만 마음은 한결 여유롭다.
 
1호선 시청역에 열차가 섰을 때, 문앞에 서있던 한 아주머니가 '쿵!' 하고 쓰러지셨다. 흔들리는 전철 때문에 중심을 잃으신 것이 아니었다. 얼굴은 창백한 채 사지를 축 늘어뜨리고 말 그대로 '실신' 이었다.

수많은 인파 속 출근길 시청역에서 그 아주머니를 부축해 일으키고, 119에 전화를 걸고, 편안한 곳에 눕혀드리는 것을 도운 사람들은 모두 3명. 다른 사람들은 대개가 시계를 보며 출근길을 재촉했다. 사람이 쓰러지는 일이 마치 '현대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모른척 해야할 일'인냥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인 사람이 쓰러지는 것은 남의 일이고 당장 5분 늦는 것은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이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결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일찍 출근하자는 것이다. 30분 일찍 출근하면 남을 위해 5분이라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일찍 나오면 '지각'이라는 손톱의 가시 때문에 한 사람의 생명을 사소하게 보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아직 스스로가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어 좋다.
Posted by 어린뿔